농업혁명
한때 학자들은 농업혁명이 인간성을 향한 위대한 도약이라고 생각했다. …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져서 자연의 비밀을 파악하고 양을 길들이며 밀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 가혹했던 수렵채집인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농부의 즐겁고 만족스러운 삶을 즐기기 위해 정착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환상이다.
농업 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기원전 8500년 야생식물이 밀에게 자리를 내어준 뒤, 이 오아시스에는 1천 명이 사는 마을이 생겼다. … 과거보다 많은 사람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허덕였다.
어느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느냐의 여부는 굶주림이나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DNA 이중나선 복사본의 개수로 결정된다. … 만일 더 이상의 DNA 복사본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종은 멸종한 것이다. 돈이 없는 회사가 파산한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한 종이 많은 DNA 복사본을 뽐낸다면 그것은 성공이며 그 종은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천 벌의 복사본은 언제나 1백 벌보다 좋다. 농업혁명의 핵심이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호모 사피엔스 DNA 복사본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치명적인 계산오류를 범했을까?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는 이유와 동일한 이유에서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 ‘일을 더 열심히 하면 삶이 더 나아지겠지.’ 계획은 그랬다.
일부러 농업혁명을 구상하거나 인간을 곡물 재배에 의존하게 만들려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배를 좀 채우고 약간의 안전을 얻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은 일련의 사소한 결정이 거듭해서 쌓여, 고대 수렵채집인들이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농경시대에는 공간이 축소되는 동안 시간은 확장되었다. 수렵채집인은 다음 주나 다음 달에 대해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농부들은 미래의 몇 해나 몇 십년이라는 세월 속으로 상상의 항해를 떠났다.
농업의 도래와 함께 비로소 인간의 마음속 극장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주연배우가 되었다. 근심하는 농부는 여름철 수확개미만큼이나 정신없이 바쁘게 일했다. … 농사 스트레스는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대규모 정치사회체제의 토대였다.
사람들이 어떻게 토지와 물을 나눌지, 불화와 분쟁을 조정할지, 가뭄이나 전쟁에서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합의가 이뤄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분쟁이 번지게 마련이다. 창고가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 프랑스 혁명의 선봉에 선 것은 굶주린 농부가 아니라 부유한 법률가들이었다.
메모리 과부하
불행히도 인간의 뇌는 제국 규모의 데이터베이스를 저장하는 장치로는 훌륭하지 않은데, 주된 이유는 세 가지다.
농업혁명에 뒤이어 유달리 복잡한 사회가 등장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정보가 중요해졌다. 바로 숫자다. … 커다란 왕국을 유지하려면 수학적 데이터가 핵심적이었다.
이 정신적 한계는 인간 집단의 크기와 복잡성도 심각하게 제한했다. … 대량의 수학적 데이터를 저장하고 처리할 필요가 생겼다. 농업혁명 이래 수천 년간 인간의 사회적 네트워크는 상대적으로 작고 단순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문제를 처음 극복한 것은 고대 수메르인이었다. 기원전 3500~3000년 어느 시기에, 익명의 수메르 천재들이 뇌 바깥에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시스템을 발명했다. 덕분에 인간의 뇌에서 비롯되는 사회질서의 제약에서 벗어나 도시 왕국, 제국의 출현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수메르인이 발명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은 ‘쓰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마침내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단조로운 수학 데이터 이외의 것을 쓰고 싶어졌다. 기원전 3000년에서 2500년 사이 수메르 문자체계에 점점 더 많은 기호가 추가되어, 오늘날 쐐기문자라고 불리는 완전한 문자체계로 점차 바뀌었다.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것을 기록하게 됨에 따라, 특히 행정부의 기록보관소가 엄청난 덩치로 커지면서,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했다. 문서를 점토에 새기는 것만으로는 효율적이고 정확하며 편리한 데이터 처리를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목록화하고 인출하는 방법을 발명해야 한다.
수메르와 파라오의 이집트, 고대 중국, 잉카 제국이 달랐던 점은 이런 문화들이 문자기록을 보관하고 목록을 만들고 검색하는 뛰어난 기술을 개발했다는 점이다.
관료제에서는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주택담보대출을 위한 서랍 하나, 결혼 증서를 위한 서랍 하나처럼. 문자체계가 인간의 역사에 가한 중요한 충격은 정확히 이것, 즉 인간이 세계를 생각하는 방식과 세계를 보는 방식이 점차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자유연상과 전체론적 사고는 칸막이와 관료제에 자리를 내주었다.
역사에 정의는 없다
농업혁명 이후 수천 년에 이르는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인류는 어떻게 자신들을 대규모 협력망으로 엮었는가? … 그것은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체계를 고안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협력망은 사람들을 서열로 구분된 가상의 집단으로 나눴다.
부당한 차별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심해질 수 있다. 역사에서 한번 희생자가 된 이들은 또 다시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하다. … 호모 사피엔스의 각기 다른 집단이 지니는 생물학적 차이는 사실상 무시할 만한 수준이므로 생물학으로는 인도 사회의 곡절이나 미국 인종차별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이라는 우리의 관념은 생물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서 온 것이다. ‘자연스러움’이란 말의 신학적 의미는 ‘자연을 창조한 신의 뜻에 맞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 그 사용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인체의 장기 중에 그것이 원형 상태로 수억 년 전 처음 등장했을 때 했던 일만을 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인류의 통합
돈의 향기
맨 처음에 화폐의 최초 버전이 만들어졌을 때는 사람들이 이런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내재적 가치를 지닌 물건을 ‘화폐’로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역사상 최초의 화폐로 알려진 수메르인의 보리 화폐가 좋은 사례다.
화폐의 역사에서 진정한 돌파구가 생긴 것은 그 자체로는 내재적 가치가 없는 돈, 그렇지만 저장과 운반이 쉬운 돈을 사람들이 신뢰하게 되었을 때다. 그런 화폐는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의 중간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출현했다. 은으로 된 세겔이었다. … 보리와 달리 은 세겔은 고유한 가치를 지니지 않았다. 은은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옷을 해 입을 수도 없다.
주화의 표식은 그 주화의 가치를 보장한 어느 정치 권력의 서명이었다. ‘나, 위대한 왕 누구누구는 이 금속 원반에 정확히 5그램의 금이 들어 있다는 점을 개인적으로 보증한다.’ 돈을 위조하는 행위는 단순한 사기가 아니라 주권 침해이고, 왕의 힘과 특권과 왕 개인에 대한 반역 행위이다.
중국인, 인도인, 무슬림, 스페인인의 문화가 서로 다른데도 다들 금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 두 지역이 일단 무역으로 연결되면, 운송가능한 물품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힘에 의해 평준화되는 경향이 있다. 두 지역 사이에 정기적인 무역이 시작되었을 때, 한 지역은 금에 관심이 없고 다른 지역에서는 금이 가치가 높다면, 이 사이를 여행하는 상인은 금의 가치 차이에 주목했을 것이다. 머지않아 두 지역에서 금의 가치는 매우 비슷해질 것이다. 그저 한 지역이 금을 신봉한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지역도 금을 믿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종교의 법칙
농업혁명이 미친 최초의 종교적 효과는 동식물을 동등한 존재에서 소유물로 끌어내린 것이다. 고대 신화의 많은 부분은 실상 인간이 동식물을 지배하는 대가로 신들에게 영원히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담은 법적인 계약이었다. 농업혁명 이래 수천 년간 종교의 예배는 주로 인간이 신에게 양과 포도주, 케이크를 바치고 그 대가로 풍성한 수확과 가축의 다산을 약속받는 것이었다.
왕국과 교역망이 확대되자 왕국 전체나 교역 지대 전체를 아우르는 존재들, 다신교가 출현했다.
대부분의 다신교, 심지어 애니미즘 종교도 최고권력을 인정했다. (일신교적인 성격) 일신교와 구별되는 다신교의 근본적 통찰에 따르면, 최고 권력은 편견을 지니고 있지 않다. 권력에게 승리나 건강, 비를 요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대신 부분적 힘들 (하위 신)의 도움에 의지할 수 있다.
다신교는 본질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으며 ‘이단’이나 ‘이교도’를 처형하는 일이 드물다. 로마인들이 오랫동안 관용을 거부했던 유일한 신은 일신교적이고 개종을 요구하는 기독교의 신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신교 신자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수호신을 몹시 좋아한 나머지 다신교의 기본 통찰에서 멀어졌다. 그 신도들은 병에서 회복되도록, 복권이 당첨되도록 우주의 최고 권력에게 간청했다.
최초의 일신교는 기원전 1350년경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다신교는 여기저기서 다양한 일신교를 잉태했으나 (유대교가 대표적) 선교를 하지 않았고 주변부에 남아 있었다. 비약적 돌파구는 기독교와 함께 왔다. 예수의 이야기를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할 이야기로 생각하고, 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할 필요가 있다고 추론했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인류를 겨냥해 광범위한 선교활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성공의 비결
다수의 작은 문화에서 몇 개의 큰 문화로, 마지막에는 하나의 전 지구적 사회로 이행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사 역학에 따른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지구촌 사회가 필연적이었다고 해서 최종 결과가 지금 우리가 사는 특정한 종류의 지구촌 사회처럼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4세기가 시작할 무렵 로마 제국 앞에는 다양한 종교적 선택의 가능성이 펼쳐져 있었다. 다채로운 다신교를 고수할 수도 있었다. 왜 예수를 택했을까? 역사학자들은 추측은 할 수 있지만 확정적 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기독교가 어떻게 로마 제국을 접수했는지 서술할 수 있지만, 어째서 이 특정한 가능성이 현실화한 것인지는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를 서술하는 것과 ‘왜’를 설명하는 것은 뭐가 다를까? ‘왜’를 설명한다는 것은 왜 다른 사건이 아니라 하필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인과관계를 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유럽인이 어떻게 아프리카인을 지배하게 되었을까를 연구하면, 인종의 계층은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세계는 달리 배열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